Stellarain

1화. Prolog

alseld 2025. 2. 5. 06:50

선홍 빛으로 붉게 물든 하늘. 그리고 마치 피가 흥건하게 밴 천처럼, 새빨갛게 물든 채 지평선에 걸려있는 태양.

 

 

그리고 정말 지독하리만치 끔찍한 광경들.

 

 

콰아앙-. 펑. 후드득. .

 

 

온갖 것들이 터져나가는 소음과 그것들이 뿌려대는 그림자.

형체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파괴되어 거리에 흩뿌려진 구조물들.

머리와 팔다리가 날아간 채, 온몸에 잔뜩 균열이 일어난 거대한 조각상.

갈기갈기 찢긴 채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기계장치의 잔해들.

엉엉 울음을 토해내며 엄마를 부르는 아이들의 비명 섞인 목소리.

건물의 잔해에 깔린 사람들을 눈앞에 두고, 넋이 나간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내.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삼키려는 듯 게걸스럽게 세를 불리는 화마.

 

 

뜨겁게 타오르는 검붉은 불꽃이 그 모든 것들을 집어삼키기 직전. 환한 빛무리가 그들을 감쌌고,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마치 아무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듯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았다.

 

 

화마는 애꿎은 건물의 잔해들이라도 다 먹어 치워 버리겠다는 듯이, 멈추지 않고 게걸스럽게 그 세를 불려 나갔다.

 

 

그 위로, 후드를 쓴 채 작은 비상 탈출용 비행 보드를 몰고 날아가는 두 인영과 둘을 쫓는 수많은 함선들. 말 그대로 지옥도가 펼쳐진 고풍스러운 신전의 폐허에서, 두 사람은 사력을 다해 달아나고 있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몰린 걸까. 여력을 조금만 더 남겨놨더라면 이렇..

 

 

쐐액-! 텅.

 

 

왼쪽의 남자가 잡념에 빠진 사이, 정확하게 그들을 노리고 뒤에서 날아온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 오른쪽의 여자가 허공에 은은한 달빛이 흐르는 물의 방패를 생성해 날아오는 포화를 쳐내며 소리쳤다.

 

 

“정신 안 차려? 지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는 거야?”

 

 

.. 고맙다.”

 

 

지금..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계속 그렇게 멍 때리고 있을 거야? 지금 여기서 우리가 당하면 또 같은 일들이 반복될 뿐이라는 거, 누구보다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잖....아..?”

 

 

.. 그렇지. 정신 차려야 하는데.. 자꾸만 온몸에 힘이 빠지고 눈이 감겨 온다.

 

 

배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통증. 환부를 누르고 있던 손을 살며시 떼 보자, 피로 흥건한 손바닥이 보인다.

 

 

아무래도 더 이상은..

 

 

밀리..? 대체 언제 그런 거야? 괜찮은 거야? 조금만 더 버텨 봐!

 

 

그녀가 서둘러 두 손을 모으더니, 그 사이에 물의 구체를 생성하기 시작했다.

 

 

후욱, 후우- . 점점 숨을 쉬는 것도 힘겨워지기 시작한다. 그래. 차라리, 조금이라도 여력이 더 남아있을 때.

 

 

밀리라고 불린  남자는 피가 묻지 않은 손으로, 그녀를 저지하듯 손목을 잡아채고 말했다. 

 

 

“루..나, 내 말.. 똑똑..쿨럭!..히 들어. 쿨럭!”

 

 

“..하지 마.”

 

 

하하.. 역시 눈치 하나는 더럽게 빠르단 말이야.

 

 

남자는 목에 걸고 있던 둥근 모양의 장치를 바라봤다. 네 개의 서로 다른 색과 형태를 가진 보석들이 달려 있었는데, 그중 두 개는 멀쩡하고 두 개는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균열이 일어나 있었다

 

 

그는 멀쩡한 보석 두 개 중 하나를 손으로 움켜잡았다.

 

 

쏴아아-.

 

 

차례 강한 빛무리가 일어나더니, 빛무리들이 그의 몸을 감싸 안고 흡수되듯이 사라졌다. 그가 움켜쥐었던 보석은 전혀 다른 형태의, 곳곳에 금이 간 채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보석으로 바뀌어 있었다.

 

 

휴우. 한시름 놨군. 그래도 하나라도 남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리 고민해도, 이렇게 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남자는 결심한 듯. 그의 목에 걸린 장치를 벗어 여자의 목에 걸어주었다.

 

 

그녀는 눈물을 삼키듯, 울먹이며 말했다.

 

 

제발, 이러지 마. 어떻게든-”

 

 

너도 이렇게 하는 게 최선이라는 거, 아니. 유일한 방법이라는 거. 알고 있잖아.”

 

 

상황은 최악이라는 말로도 모자라다. 마치 해일처럼 끝도 없이 밀려들어오는 적들의 함대.

생존한 시민들을 보호하고 전선 밖으로 대피시키느라 비축해 뒀던 목숨도 하나를 제외하고는 전부 사용해 버렸다..

 

 

그는 확신했다.

 

 

아직 여력이 남아있는 루나라도 확실하게 탈출시켜야, 그들의 계획이 실행될 수 있다고.

 

 

저 자식들, 처음부터 에켈란젤로 전체를 지도에서 지워버릴 작정으로 함대를 보냈어. 일부러 우리가 가장 약해진 순간을 노려서.”

 

 

이 세상 누구보다도 현명한 그녀라면 이미 나보다도 더 잘 알고 있겠지. 역시나 루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먹을 꽉 쥔 채 분을 삭이고 있다.

 

 

더 이상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녀도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어떤 것인지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낼 유일한 방법이야.”

 

 

그는 무릎을 털고 일어서며, 뒤돌아서 활시위에 빛의 화살을 먹였다.

 

 

루나는 붉은 석양의 빛 때문에 새빨간 피처럼 물든, 그의 태양 빛을 닮아 찬란한 금발을 바라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지기 직전의 해는, 역시 너무 위태로운 색이라고.

 

 

그의 뒷모습은 너무나 쓸쓸하지만, 죽어가는 생명의 불꽃을 마지막으로 피워내려는 듯,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빛나는 석양을 꼭 닮아있었다.

어느새 흘러나오는 눈물을 소매로 훔치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

 

 

“..이곳에 지켜야 할 대상은 더 이상 없어. 그러니까, 이제 마음 편히 날뛰어도 괜찮아. 뒷일은 내가 어떻게든 해결할 테니까.”

 

 

그녀의 말에 밀리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고,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믿고 맡길게. 우리의 후손들에게, 미래를 선물해 주자고.”

 

 

휘잉- 탓.

 

 

눈앞에 펼쳐진 함대의 바다를 향해 시위를 놓은 남자는, 그 자세 그대로 보드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낙하하는 도중에도 계속해서 활시위를 당겼다. 그의 손끝을 떠난 화살들은 하나하나가 태양을 담은 듯, 지독하게 찬란한 빛을 내뿜으며 이글거렸다.

 

 

휘이-콰아앙. 콰앙. 쾅.

 

 

그의 손에서 화살이 떠날 때마다 폭발에 휩쓸린 함선들이 허무하게 터져나갔다.

 

 

갑작스러운 반격에 당황해 우왕좌왕하던 함선들이 조금씩 정신 차린 듯 각양각색의 보호막을 전개하고, 사방으로 뿌려대던 포격을 그에게로 정조준하기 시작했다.

 

 

후우- 하아.

 

 

그는 눈을 감은 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었고, 천천히 다시 눈을 떴다. 따듯하고 포근했던 그의 황금빛 눈은, 좀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차갑고 날카로운 빛은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얼어붙은 그의 눈빛과는 대조적으로, 그가 내뿜는 기세는 온 세상을 불태워버릴 듯 뜨겁게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터엉, 터엉-

 

 

그는 활시위에 평소보다 많은 힘을 모아 구형의 에너지 덩어리를 만들어 내더니, 머리 위로 쏘아 올렸다. 그렇게 같은 행동을 몇 번 반복했다.

 

 

쏘아 올려진 구체들은 낮은 포물선을 그리며 그의 눈높이로 다시 떨어졌고, 그의 주위를 공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전하던 구체들은 서로 충돌해 순식간에 하나의 커다란 구로 합쳐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그의 상체만 한 크기의 태양을 닮은 구체는, 위성처럼 그의 주위를 공전하며 사방으로 에너지 덩어리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구체가 쏘아내는 빛의 포탄들은 적들의 공격을 요격하고, 함선들을 직접 타격하기도 하며 그의 공격을 보조했다.

 

 

함선들이 날려오는 포화는 그의 지척에도 다다르지 못하고 소멸하는 반면, 그의 공격은 보호막을 뚫고 들어가 함선들의 숫자를 눈에 띄게 줄이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하늘을 가득 채운 함선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끝없이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우우우우우웅-

 

 

그렇게 계속되는 소모전에, 평범한 공격으론 어림도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일까. 함선들이 포격을 중지하고 모든 에너지를 방어벽에 쏟아부은 채 가장 큰 함선을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하더니, 엔진 소리가 점점 증폭됐다.

 

 

그리고 하나 둘 붉게 물들기 시작하더니,

 

 

콰아아아아아앙-.

 

 

결국 선체가 터져나가며 함선 하나가 어마어마한 폭발을 일으켰다. 이 폭발을 시작으로, 근처에 있던 함선들이 하나 둘 터져나가며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발산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그는 다시 한번 숨을 크게 내쉬더니 눈을 감고, 루나와의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가늠했다.

그리고 다행히 그와 그녀 사이의 간격에는 민간인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를 확인한 즉시, 그는 손에 쥐고 있던 활의 형태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활은 찬란한 빛을 뿜어내며 녹아내리고서는 그의 손으로 흡수되었고, 그가 양팔을 하늘로 뻗자 곧바로 거대한 타원체 모양의 돔이 생성되었다.

 




 

콰앙-----.

루나는 갑작스레 들려오는 굉음에 뒤를 돌아봤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코 앞에 생성된 거대한 돔이었다.

 

 

돔은, 찬란한 금색의 빛을 내뿜고 있었지만 투명해서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리고 곧바로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돔 내부의 거대한 폭발.

 

 

그녀는 허망한 표정으로, 보드에서 내려 돔을 향해 조금씩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돔의 내부는 폭발의 여파로 온통 새빨간 불꽃과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바로 코 앞에 있는 그녀에게는 조금의 열기도, 충격도 느껴지지 않았다.

 

 

완벽한 공간의 단절.

 

 

폭발과 그 후폭풍으로 인해, 돔 내부는 점점 새카만 연기로 가득 차고 있었다. 동시에, 돔은 조금씩 진동하더니 그 크기가 점점 수축하기 시작했다.

 

 

돔이 수축하며 생긴, 완전히 비어있는 공간으로 거센 바람과 바닷물이 밀려 들어와 회오리치기 시작했고.

 

 

파앗-.

 

 

그녀의 목에 걸린 장치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