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llarain

18화. 에켈란젤로(4)

alseld 2025. 4. 7. 19:10

나는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젠 하다 하다 정말 피를 보는구나.



무뎌졌던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니, 터져 나간 뺨에서 욱씬거리는 통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대체 얼마나 세게 때린 거야..?



나는 한숨을 크게 한 번 푹 쉬고는, 에테르를 물의 형태로 정제하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무얼 해야 할 지 알고 있다는 듯이.



물의 형태를 띄게 된 에테르들은 잠시 허공에서 소용돌이 치다 빠르게 내 손 위에 주먹만한 구체의 형태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물의 구체는 은은한 에메랄드빛을 띄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왜 그렇게 주눅들어 있어. 이정도야, 뭐 별 거 아니야."



물의 페르소나는, 생명과 재생의 개념 또한 포함하고 있었다.



나는 앨리스에게 괜찮다는 말을 건네며, 구체를 허공으로 좀 더 띄워 올렸다.



앨리스는 언제 시무룩 했냐는 듯, 어느새 눈을 반짝이며 내가 만들어 내고 있는 현상을 구경하기 시작했고. 역시, 참 단순하다니까.



재생의 빛을 담은 물은 곧 내 얼굴로 가까이 다가와 상처 부위를 쓸고 지나갔고, 그 궤적을 따라 부드럽게 퍼지더니 사르르 녹아내려 흡수됐다.



살짝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와아.. 알렉스, 너 뭐야? 이런 것도 할 줄 알아?? 상처가 깔끔하게 다 아물었잖아?! 노후 걱정은 없겠다. 은퇴하면 병원 차리면 되겠네 병원!"



앨리스가 또 저렇게 주접을 떠는 걸 보니, 상처는 잘 아물었나보다. 



그냥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했는데. 항상 사용해오던 능력처럼 자연스럽게 쓸 수 있는 걸 보니, 신의 능력을 물려받았다는 실감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아니, 아가씨도 그렇고 도련님도 그렇고. 언제부터 에테르를 다룰 줄 아셨던 겁니까..?"



어..음.. 그러고 보니, 집사님 생각을 못 했네.



집사님은 두 눈을 땡그랗게 뜨고, 입을 떡 벌리고선 놀란 표정을 짓고 계셨다. 표정관리를 저렇게까지 못 하시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그.. 그냥 테스트 할 때 에테르를 느끼게 된 이후로, 자연스럽게 써지던데..?"



아니, 앨리스.. 그게 말이 되는 변명이라고 생각해?



나는 집사님의 시야에 닿지 않게 앨리스를 툭 툭 건드리며 흘겨봤다. 그러자, 앨리스는 불만이 가득 섞인 눈초리를 쏘아 보냈고.



왜. 뭐. 너 때문에 벌어진 상황인데, 왜 네가 그렇게 쳐다보는건데.



하지만 그런 소리 없는 다툼이 무색하게, 집사님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수긍을 하시는 듯 보였다.



"하긴, 영주님도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날 부터 에테르를 다룰 줄 아셨었죠. 그래도 그 정도로 정교하게 컨트롤하지는 못 하셨는데, 역시 두 분의 재능은 영주님보다도 더 뛰어나신 듯 하군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집사님의 입꼬리가 살짝 씰룩 하고 올라가 있었다. 명백하게 기분이 좋다는 신호였다.



이게 통한다고..?



우리 집사님, 팔불출인줄은 알았는데 저 정도로 중증이실줄은 또 몰랐네..



아무튼, 잘 수습이 된 것 같아 다행이었다.



우리는 멋쩍게 웃어 넘기며, 다시 한 번 집사님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출입구를 통해 상아탑으로 넘어왔다.








"음.. 이제 삼촌한테 연락을 하면 되려나?"



우리는 출입구를 통과해, 집무실에서 포탈을 통해 이동했던 창고의 문 앞에 서있었다.



"일단 그러자. 삼촌한테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고."



나는 타불라를 조작해서 집무실에 있던 단말에 통신 연결 요청을 보냈다. 타불라를 어떤 식으로 다루는 건지는 집사님이 대략적으로 알려주셔서, 이제 별 무리 없이 기본적인 기능들은 활용할 수 있게 됐다.



뚜두두두. 뚜두두두.



잠깐 신호음이 울리더니,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신호음이 멈췄다.



- 아, 아. 알렉스? 들려? 어떻게, 통신을 알아서 잘 걸었네?



그리고, 타불라에서 빛이 새어나오더니, 삼촌의 형상을 한, 빛으로 이루어진 작은 인형이 허공에 떠올랐다. 마치 진짜 저 인형이 말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응. 집사님이 어떻게 다루는지 대충 알려주셨어. 삼촌, 이럴 줄 알고 타불라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안 알려준 거지?"



-아하하.. 그만큼 너희랑 더글라스 형님을 믿었다는 거지! 인사는 잘 나눴고? 그럼, 바로 에켈란젤로로 이어지는 포탈을 열어줄까?



"음.. 그 전에, 아까 좀 신경쓰이는 일이 생겨버려서 말이야. 잠깐 다시 집무실에서 이야기좀 해도 될까? 아무래도 개방된 곳에서 나눌만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서."



- 음, 그래. 그럼 지금 너희랑 제일 가까운 좌표가.. 아, 바로 앞에 있구나? 역시 우리 조카님들, 참 똑똑하단 말이야! 잠깐만 기다려. 바로 포탈 열어줄게.



삼촌의 마지막 말이 끝나고, 뚝- 소리와 함께 인형이 사라지며 통신이 끊겼다.



그리고, 우리 눈 앞에 있던 창고의 문틈에서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문을 통해 열린 포탈을 따라, 우리는 다시 최상층의 집무실을 향해 이동했다.








"왔구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목소리가 꽤 심각해 보였는데."



집무실에 돌아오자 마자, 삼촌이 달려나와 우리를 반겨줬다.



"저, 그게.. 내가 실수로 힘 조절을 잘못 해서 알렉스 뺨을 터트려버렸지 뭐야.. 그래서 알렉스가 조금 삐졌나봐.."



"하핫, 아무래도 없던 능력이 하루 아침에 생기니 컨트롤하기가 좀 어렵지? 그동안 하던대로 했다가는 다 때려 부술 수도 있다, 너?"



응. 그거 아니야, 앨리스



앨리스의 말을 듣고 잔뜩 신이 나서 나를 놀려먹을 준비를 하는 삼촌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먼저 말을 꺼냈다.



"그것도 그건데, 삼촌. 나, 아까 정체성에 좀 혼란이 왔었어."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알렉스 너, 아까는 그런 말 전혀 없었잖아!"



"......좀 더 자세하게 말 해볼래?"



내 말을 들은 삼촌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역시, 삼촌은 뭔가 알고 있었던 걸까.



나는 방금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미드가르드에서 상아탑으로 바로 들어오는 전용 출입구 말이야. 그 앞에서 집사님이랑 대화를 조금 하던 중이었어."



"아, 설마 갑자기 멍때리고 그럴 때?"



"그래. 집사님이 외부인의 출입을 제한하기 위한거라는 이야기를 할 때, 갑자기 열이 확 받더라고. 내가 상아탑을 세울 때, 분명 모든 시민들에게 개방된 공간으로 만들려고 했었는데! 하고 말이야."



"그건, 마치.."



"맞아. 꼭 내가 상아탑을 세웠던 초대 스칼루나라도 되는 것 처럼 말이야."



"어쩐지, 잘만 대화하다 갑자기 창백하게 얼어붙어서 좀 이상하다 싶었어! 내가 괜히 빰을 그렇게 때렸겠냐구!"



"하하, 그래. 그런 생각이 들고 나니까 머릿속이 완전 뒤죽박죽이 되고, 내가 누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가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었는데 덕분에 제대로 정신 차렸지. 대신 뺨이 좀 터져 나갔지만 말이야."



"말도 안 돼.. 그럴리가.. 뭔가, 뭔가 잘못 된건가? 아니면, 혹시.. 내가 속은건가?"



내 말을 들은 삼촌은 안색이 하얗게 질려서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중얼거리면서 생각에 깊이 잠겨들었다.



음.. 반응을 보니, 삼촌도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예상을 못 했던 것 같은데.



"삼촌, 삼촌! 원래 메모리 박스를 사용하면 이런 부작용이 생기기도 하는거야?"



나는 삼촌에게 다가가, 어깨를 잡고 흔들며 물었다.



삼촌은 정신이 들었는지,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추고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아니, 메모리 박스에는 그런 부작용은 없어. 만든 사람이 작정하고 자신의 기억을 그대로 덮어 씌우려고 하지 않는 이상에는. 그것 마저도 서로 고유 진동수가 맞아서 공명이 일어나야 가능하고."



"그럼 설마, 전대 달의 신이 일부러 그랬을 수도 있다는 거야?"



"그럴 가능성이 제일 높아보이기는 해. 그런데, 그 분들이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싸워왔는데.. 그런 짓을 저질렀을 거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서. 그래서 지금은, 정말 괜찮아? 너, 알렉스 맞지?"



"응. 지금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아. 알렉스 맞아, 나."



삼촌은 내 대답을 듣고, 내 두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느 정도 안심했다는 듯 어깨를 쓸어내렸다.



"후우.. 거짓말은 아닌 것 같고. 그럼 크게 걱정하진 않아도 될 것 같아. 아무래도 300년이 넘는 시간의 기억들을 한꺼번에 빠르게 주입한데다, 적합도가 많이 높아서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네. "



무엇을 느낀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는 말을 들으니 나도 꽤나 안심이 됐다.



"뭐야, 나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왜 똑같이 봤는데 나는 그런거 없어?"



"하하, 글쎄.. 삼촌도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어. 신의 기억을 메모리 박스로 넘겨주는 일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을리도 없고 말이야."



하긴. 신의 자리를 계승하는 일이 그렇게 자주 있지는 않았을테니, 그럴 만도 했다. 많아봐야 수십년에 한 번 일어났을테니까.



너무 길고 생생한 꿈을 꿔서 잠깐 혼란이 생겼던 거라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삼촌도 크게 걱정 안 해도 될거라 했고.



"그럼 괜찮은 것 같으니까. 이제 다음 메모리 박스를 회수하러 가 볼까?"



"안 돼."



그래서 별 일 아니라는 듯, 다음 목적지로 이동시켜 달라는 이야기를 꺼내봤는데. 저렇게 단호하게 불가하다는 대답이 돌아올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응? 크게 걱정 안 해도 괜찮다며. 이제 괜찮다니까? 아까는 바로 에켈란젤로로 보내준다고 했었잖아! 그럼 애초에 두 번째 메모리 박스까지는 빠르게 회수할 생각이었던거 아니었어?”



“그 때는 첫 번째 박스가 이정도로 큰 영향을 줄지 몰랐으니까. 원래도 메모리 박스는 절대 많은 양을 짧은 시간동안 사용하지 말라고 권고하고 있어. 심지어 그런 일도 있었는데, 바로 다음 박스를 흡수하는건 좋지 않은 선택이라고 본다. ”



“음.. 그럼 얼마나 시간 간격을 두고 흡수해야 하는데?”



“아무리 짧아도 3일정도의 간격은 둬야 해. 애초에 다음 박스를 찾는다고 해도, 며칠 더 텀을 두고 흡수하라고 말 할 생각이었고. 그런데 오늘 그런 증상이 나타난 이상, 최소한 일주일은 더 쉬었으면 좋겠어. 무슨 말인지 이해 하지, 알렉스?”



“와아! 그럼 우리 휴가 생긴거야 휴가?? 일주일 휴가!”



하하.. 그래, 뭐. 반대 입장이었다면 나도 어떻게든 말렸을 것 같긴 하다.



“아하하, 그래. 휴가라고 생각하고, 일주일정도 푹 쉬는게 좋을 것 같다.”



그래, 뭐. 급하게 먹다 체하는 것 보다는, 천천히 꼭꼭 씹어 삼키는게 낫겠지. 



“알겠어. 그럼 대신, 에켈란젤로에서 쉬어도 괜찮아? 겸사겸사 주변 지리에 좀 익숙해지면 좋을 것 같아서. 알아보고 싶은 것도 있고.”



“꺄아! 나는 좋아! 에켈란젤로! 가자!!”



“그래, 그정도는 괜찮겠지. 그런데, 알아보고 싶은게 있다고? 그게 뭔데?”



“음.. 오늘 더글라스 집사님한테 들었는데, 부모님이 출장가신 곳이 에켈란젤로라고 알고 계시더라고.”



“......뭐? 나는 그런건 설정 한 적 없는데..?”



“응. 그런 것 같았어. 삼촌이 수정했던거면 진작 알려줬겠지. 그래서, 에켈란젤로에 가면 부모님에 대한 소식을 좀 더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