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llarain

11화. 일곱 신(1)

alseld 2025. 3. 13. 20:15

“하아.. 어쩐지 아까부터 과하게 미안해 한다 싶더니. 어쨌든, 여기에 타불라를 올리면 된다는거지?”



일단 활성화인지 뭔지나 빨리 해치워버리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할지를 좀 이야기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아하하… 그래, 맞아. 낯선 기억들이 잔뜩 몰려올테니까, 너무 놀라지 말고. 아마 꿈을 꾸는 것 같은 느낌일거야.”



나는 손에 들려있는 상자를 돌려가며 여기 저기 살펴봤다. 옆쪽 면 중 하나에는 구멍이 나 있었는데, 그것을 제외하면 균일한 정육면체 모양이었다.



“헤에..  어떤 능력이 생기려나? 더 멋있어져서 돌아올게 삼촌!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앨리스는 싱글벙글 웃으며 타불라를 상자의 윗면에 올려두었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음… 삼촌..?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데?”



그 말을 듣고, 나도 타불라를 내 상자에 올려보았지만 마찬가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삼촌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잔뜩 쏘아보냈다.



“하하, 조금만 기다려 봐.”



그러고선, 삼촌은 두 상자에 각각 한 손씩 올리고 눈을 감았다. 삼촌의 양손에서 상자와 같은 색의 빛이 새어나오더니, 조금씩 모여서 특정한 형상을 만들어갔다.



빛이 뭉쳐져 만들어진 것은, 각각의 상자와 똑 닮은 색의 열쇠였다. 열쇠 각각의 손잡이 부분은 상자 윗면에 있는 문양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열쇠가 완성되자 삼촌이 허공에 손짓을 했고, 그러자 허공에 둥둥 떠있던 열쇠가 저절로 상자에 있는 구멍으로 들어가더니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며 딸깍- 하는 소리가 났다.



“자, 이제 준비가 끝났어. ‘활성화’라고 말 하면, 시작될거야.”



삼촌은 우리를 지긋이 바라보며, 천천히 한명 한명 눈을 맞췄다. 



나는 삼촌에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 모습을 본 삼촌은, 또 피식 하고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고. 



아직 삼촌에겐 우리가 3년전의 기억 속 그대로일테니, 계속 걱정하고 어린아이 취급 하는것도 어느정도 이해는 됐다.



““활성화.””



삼촌의 눈을 바라보며, 나는 더이상 지체 없이 ‘활성화’라고 소리내어 말했고, 신기하게도 정확하게 동일한 타이밍에 앨리스도 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열차에서 티켓이 분해됐던 것처럼, 상자들이 작은 빛 알갱이들로 분해되기 시작했다. 분해된 입자들은 우리 주변을 잠시간 돌며 온 몸을 훑더니, 다시 머리 근처로 모여들었다.



파앗-.



그리고, 눈 앞에서 환한 빛을 내뿜었다.








벌컥-, 쾅.



“...하아, 여기도 없어?”



누군가 문을 박차고 들어와 방을 쓱 훑어보더니,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곤 다시 돌아서 나갔다. 



문은 끼익- 끼익- 소리를 내며 구슬프게 울었고, 이내 다시 닫히며 잠잠해졌다.



“얘는 이런 날까지 대체 어디를 간 거야! 설마, 또?”



방문을 무자비하게 걷어찼던 남자는, 잠시 서서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뒤돌아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많아야 20대 중반정도로 보였고, 한 여름의 쨍한 태양빛이 떠오르는 금발과 황금빛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그가 달려서 도착한 곳은, 거대한 서고였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온 벽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책장들이 눈에 들어왔고, 중앙에는 거대한 샹들리에 아래에 원형의 커다란 탁자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탁자에 앉아 책을 잔뜩 쌓아두고 읽고 있는, 커다란 안경을 쓴, 은은한 푸른빛이 맴도는 은발의 여자가 있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다가가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 지르듯 말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 여기 있었어? 오늘이 무슨 날인지 잊은건 아니지?”



여자는 잠깐 책에서 눈을 떼고, 한쪽 손의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댄 채 남자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쉿-. 서고에서는 그렇게 목소리 높이는거 아니야, 밀리오스. 책을 읽는데 오늘이 무슨 날인지가 중요한가?”



밀리오스라고 불린 남자는, 속이 터진다는 듯 가슴을 손으로 두드리며 조금 목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아니, 아무리 책이 좋아도 이런 날까지 꼭 읽어야겠냐고! 이미 다들 모여서 기다리고 있어! 스칼루나 너, 시간도 확인 안 하고 있었지? 괜히 나만 대장한테 한 소리 들었잖아!”



여자는 별 관심 없다는 듯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며, 무신경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쟁이 끝난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있는 돈 없는 돈 싹 긁어모아서 서고부터 복원 해줬는데. 내가 그 성의를 봐서라도 하루라도 책을 안 보고 배겨?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네, 뭐.”



“그 복원 해준 아저씨를 황제로 책봉하는 날이잖아 오늘이! 아무리 책이 좋아도, 이런 행사들은 제대로 준비좀 하자, 제발.. 모두들, 희망이 필요하다는거 알잖아.”



남자의 말에, 여자가 들고 있던 책을 드디어 덮고, 책상 위에 쌓여있던 책더미 제일 위에 올려놓았다.



“뭐, 사람들이 열심히 꾸민 내 모습을 보고 대체 왜 희망을 갖게 될거라 말하는건지는 이해가 안 되는데, 그래도 내가 너무 무신경했던건 인정. 역시 이 모습 그대로 가는건 좀 그렇지? 아저씨 체면을 세워주기는 해야지.”



자리에서 일어난 여자는 안경을 벗어 접고, 방금 올려놓은 책 위에 얹어놓았다.



“뭐하고 서 있어? 가자. 시간 없어.”



그렇게 말한 여자는 빠른 걸음으로 서고 밖으로 향했다.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여자의 뒤를 따라 나섰다.








넓은 홀에 울려퍼지는 온갖 악기들이 어우러진 경쾌한 음악소리. 그리고 그 공간을 가득 채우는 사람들의 목소리.



기나긴 전쟁이 남긴 상흔은 깊었고, 여전히 다들 상처가 아물지 않은 듯 했다. 그래도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듯, 대다수의 사람들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연회장의 가장 상석에서, 서고에서 대화하던 두 사람과 40대 중반쯤 되어보이는 왕관을 쓴 남자가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하하, 고생은요. 저에겐 무한한 영광입니다. 그런데 정말 저에게 이런 과분한 자리를 넘겨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에이, 원래 하던 사람이 해야 잘 돌아가지! 우리는 그런 감투에는 별 관심도 없고, 잘 할 자신도 없어. 나야 뭐 할줄 아는게 전쟁터 나가서 싸우는 거 말고 더 있어? 루나는 연구실에 틀어박혀서 허구한날 정신 수양이니 뭐니 하느라 바쁘고.”



“맞아요, 다른 대륙들처럼 왕가가 싹 다 망한 것도 아니고, 아저씨가 살아 있는데 굳이 우리가 그 자리를 꿰차서 뭐 해요, 잘 맞는 옷도 아닌데. 아저씨는 하시던대로 쭉 좋은 황제가 되어주시면 되요. 우리가 뒤에서 잘 지켜드릴게요.” 



아저씨라고 불린, 황제의 자리에 앉게 된 남자는 고개를 숙여 다시한번 두 사람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두 분은 그럼 이제부터 어떤 일을 하고 지내실 생각이십니까? 이제 그 길고 길었던 전쟁도 끝나고, 드디어 평화로운 시대가 찾아왔는데요.”



금발의 남자는 정말 아무런 생각이 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당연스럽게 대답했다.



“음…나야 그냥 루나가 하는거 같이 하겠지 뭐! 언제나 그래왔으니까?”



그런 그가 익숙하다는 듯, 들은 체도 안하고 여자가 자신이 구상해왔던 계획에 대해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저는… 탑을 세울 생각이에요.”



“탑, 말입니까?”



황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탑을 세운다는게, 정확히 어떤 목적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는 듯 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 자세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네. 거대한 탑을 지을거예요. 그리고 그 곳에 학문에 뜻이 있는 자들을 불러모아서 지금까지 축적해온 지식들을 후대에 물려주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만들고 싶어요.”



“뭐야, 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럼, 전쟁이 끝나고 허구한날 책만 읽어댔던 것도..”



남자가 굉장히 의외라는 듯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여자는 그를 바라보지도 않고, 계속 황제를 바라본 채로 말을 이어나갔다.



“응. 탑을 세우는데 필요한 것들을 좀 구상하느라. 설계도도 어느정도 머릿속으론 그려뒀고. 그래서 말인데요 아저씨, 땅좀 내주실래요?”



“정말 멋진 생각이군요. 그런 탑을, 이 도시에 세워주시는 겁니까? 땅은 당연히 얼마든지 내드려야죠. 선생님들이 아니었으면 되찾지 못했을 텐데요.”



“이제 이곳이 우리의 터전인걸요. 뿐만 아니라 중앙대륙에 위치하는 편이 전세계의 학자들을 불러모으기도 좋을 것 같아서요.”



“후자쪽이 진심인 것 같긴 한데, 어쨌든 좋은 생각인건 맞는 것 같은데? 우리 후손들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게 하려면, 그런 지식을 계승하는 곳은 꼭 필요하긴 하지. 그래서, 나는 뭘 하면 되는데?”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남자가 이런 질문을 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탑의 꼭대기에 인공 태양을 만들어 줘.”



“인공 태양?”



남자는 그게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래. 그게 우리가 세울 탑 전체의, 그리고 그걸 넘어서 이 도시 전체의 무한한 에너지 공급원이 될거야. 수많은 사람들을 수용하려면,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은 필수니까.”



그녀의 말을 들은 황제는 상기된 얼굴로, 굉장히 기뻐하며 말했다.



“무한한 에너지 공급원이라.. 그런게 정말 가능하다면, 이 도시도 빠르게 예전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겠군요. 아니, 그걸 넘어서 얼마나 더 발전할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땅을 얼마나 내드리면 되겠습니까?”



황제의 물음에, 여자는 창문 너머로 보이는 강을 손으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음… 일단 저 강 너머의 땅 대부분? 일단 중심이 되는 탑을 먼저 세우긴 할건데, 필요한 부속  시설들이 탑을 둘러싸도록 짓고 싶어서요.”



그녀의 말을 들은 황제는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강 너머의 땅이라면.. 대부분이 산지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거주민이 거의 없어서, 바로 내드릴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만..”



여자는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아저씨. 산은 밀리가 해결할거예요. 아저씨는 공사에 필요한 자재들을 수급하는것도 좀 도와줄 수 있을까요?”



그 말을 들은 남자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나요? 그러니까.. 나한테 저 산들을 다 밀어 버리라고 하는거야, 지금? 내가 무슨 밭 가는 소냐? 밀란다고 군말 없이 밀게?”



그리고 하루 뒤. 강 너머에는 광활한 평야가 생겼다.



그리고 한 달 뒤. 그 자리에 거대한 탑이 우뚝 솟아 올랐다. 그리고 탑의 꼭대기에, 태양을 닮은 빛의 구체가 그 생명의 불꽃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탑의 외벽은 연한 노란빛이 도는 백색이었는데, 생김새와 그 색이 코끼리의 엄니, 상아와 굉장히 유사했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이 탑을 ‘상아탑’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순식간에 피어난,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순환시키고 유지하는 중추이자 심장. 그 장소의 탄생이었다.



'Stellarain' 카테고리의 다른 글

13화. 일곱 신(3)  (0) 2025.03.17
12화. 일곱 신(2)  (0) 2025.03.14
10화. 태양과 달의 아이(9)  (0) 2025.03.10
9화. 태양과 달의 아이(8)  (0) 2025.03.06
8화. 태양과 달의 아이(7)  (0) 2025.03.05